‘정직한 실패자’와 ‘고의적 부실 차주’를 구별하는 옥석 가리기 필요해
26.07.27 14:57ㅣ최종 업데이트 26.07.27 14:57
양채열(jubilee2015)
롤링주빌리(www.jubileebank.kr)는 2015년 설립 이후 고통받는 소액채무자 5만여 명의 부실채권 8000억 원 이상을 소각하여 탕감하는 등 금융소외 계층의 자활을 돕는 시민운동을 펼쳐왔습니다. 롤링주빌리는 정부의 포용금융 정책 추진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기 위하여 <오마이뉴스>에 ‘포용금융’을 주제로 월 1회 따뜻한 글을 기고하고자 합니다. 두번째 기고는 양채열 롤링주빌리 이사(전남대학교 경영대학 명예교수)의 칼럼입니다.

▲포용금융은 단순히 소외 계층을 시혜적으로 돕는 복지를 넘어, 금융의 혜택에서 배제된 이들을 경제 활동의 주체로 복귀시키는 생산적 금융을 지향한다. (AI생성 이미지) ⓒ 오마이뉴스
최근 가장 자주 등장하는 화두 중 하나는 과잉부채 문제, 즉 ‘부채의 함정(Debt Overhang)’이다. 기업재무 이론에서 부채의 함정은 기업이 과다한 부채를 짊어졌을 때, 유망한 신사업 기회를 포기하여 비효율성을 초래하는 문제상황을 말한다. 즉, 기업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신규 우량 프로젝트가 존재하더라도, 투자를 통해 발생하는 미래의 과실이 기존 채권자의 빚을 갚는 데 모두 소진된다면 주주와 경영진이 매력적인 투자도 거부하는 비효율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잉부채 문제를 간단한 사례를 활용하여 설명해보자.
현재 기존 부채의 장부가치가 100억 원에 달해 자산 가치를 초과한 한 한계기업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기업에는 현재 80억 원의 투자금을 투입하면 100%의 확률로 150억 원의 확실한 현금 흐름(Cash Flow)을 창출할 수 있는 매력적인 신사업 기회가 주어졌다. 이 투자안은 순현재가치(Net Present Value: NPV)가 무려 70억 원에 달하는 우량한 프로젝트다(보다 엄밀하게 할인율을 감안한다면, 70억보다는 작은 수치이지만, 편의상 할인을 무시하자).
정상적인 구조라면 주주들은 자본을 조달해 투자하겠지만, 부채과잉 상태의 이 기업은 투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기업이 투자를 집행하여 150억 원을 벌어들여도 기존 부채 100억 원을 상환하고 나면 투자자금 80억 원을 감안하면 주주에게 돌아오는 몫이 –30억 (=150–100–80)이기 때문이다.
주주 입장에서는 투자 원금 80억 원을 조달해 투자를 실행해도 그 투자의 과실은 주주보다 우선청구권을 가진 채권자가 먼저 가져가게 되어, 투자 시 조달비용을 감안하면 더 손해를 보게 된다. 따라서 주주가 매력적인 투자도 포기하는 과소투자문제가 발생한다. 이처럼 과다 부채를 가진 기업은 유망한 신규 투자기회가 있어도 투자의 과실을 향유할 수가 없어서 투자를 포기하는 과소투자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을 과잉부채 문제라고 한다.
이러한 기업재무 차원의 부채의 함정 메커니즘이 가계 경제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기업이 부채 과잉으로 신사업을 포기하듯, 가계 역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면 노동 의지 자체를 상실한다. 예컨대 연 소득 4천만 원인 가장이 무리한 대출로 5억 원의 빚을 져 매년 소득을 훌쩍 뛰어넘는 원리금 독촉에 시달린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가장에게 연간 1천만 원의 추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이직이나 부업의 기회가 찾아와도 모두 포기한다. 그 이유는 어차피 열심히 일해서 추가 소득을 벌어봤자 모두 부채상환에 소진되고 자기에게 주어지는 몫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가계 차원의 투자 포기이며 사회적 효율성의 상실이다.
자본시장과 거시경제 관점에서 포용금융의 가치를 실현하는 부채 탕감(Debt Forgiveness)이 가지는 정당성은 과잉부채 문제를 해소하여 효율성을 증진하는 데 있다. 포용금융은 단순히 소외 계층을 시혜적으로 돕는 복지를 넘어, 금융의 혜택에서 배제된 이들을 경제 활동의 주체로 복귀시키는 생산적 금융을 지향한다.
빚을 차주가 감당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준으로 깎아주면, 기업은 신사업 투자를 재개하고 가계는 정상적인 경제활동에 복귀할 수 있다. 앞선 기업 사례에서 채권단이 과감하게 부채 중 40억 원을 감면해 주면 남은 빚은 60억 원이 된다. 이제 주주는 신사업에 80억 원을 투자해 150억 원을 벌어들이고, 이 돈으로 남은 빚 60억 원을 전액 상환한 뒤 잔여 이익 10억 원을 획득할 수 있다. 따라서 기업은 투자 포기 대신에 투자를 실행하고 채권자와 주주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가계 역시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면 신규 경제활동 재개 시 그 과실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즉, 과잉부채 채무자가 채무탕감으로 인하여 새로운 경제활동의 유인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채무자의 경제적·정신적 고통의 해소만이 아니라, 내수 활성화에도 기여한다. 금융권 입장에서도 채무자를 파산시켜 한 푼도 건지지 못하는 것보다 빚을 일부 조정해 채무자가 신규 경제활동을 하도록 하여 남은 채권을 장기간에 걸쳐 회수할 수 있게 된다. 즉, 경제주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파레토적 개선(Pareto Improvement)이 된다.
그러나 시장 규율 측면에서 포용금융의 정책적 수단인 부채 탕감은 도덕적 해이와 신용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비효율성을 내포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방만한 경영이나 무리한 대출로 부실을 자초한 주체들이 쉽게 채무를 감면받는 선례를 남긴다는 점이다. 이는 성실하게 빚을 갚아나가는 절대다수의 차입자들에게 박탈감을 안겨주며, 탕감을 유도하기 위해 고의로 소득이나 실적을 숨기는 역선택과 전략적 디폴트 리스크를 유발할 수 있다. 또한, 청산되어야 할 한계기업이나 좀비 차주들이 부채 탕감으로 억지로 연명하면서 혁신 기업과 생산적인 주체로 자원이 흘러가지 못하는 자원 배분의 왜곡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
따라서 포용금융의 채무조정이 초래할 수 있는 비효율성을 차단하는 구조 설계와 안전장치가 보완되어야 한다. 기업 부문에서는 빚을 단순히 없애주는 방식 대신, 채권을 지분 증권으로 바꾸는 출자전환(Debt-to-Equity Swap)을 우선 적용해야 한다. 향후 기업 가치가 회복되었을 때 채권단이 자본 이득을 공유하여 회수율을 높이는 동시에, 기존 대주주의 책임 정도에 따라 지분을 차등적으로 희석하여 경영권 책임을 명확히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채무조정에서 “손실의 사회화와 이익의 사유화” 문제를 방지하도록 “당장의 부채 부담을 낮춰주되, 향후 채무자의 경제적 가치(소득·자산)가 상승하면 채권자도 이익을 공유한다”는 원리를 견지하여야 한다. 가계와 소상공인 부문에서도 무조건적인 원금 감면은 철저히 지양해야 한다. 정부가 운영 중인 새출발기금의 메커니즘처럼 연체 기간과 재산 수준을 기준으로 차등을 두어, 장기 연체된 부실 차주의 순재산 초과분에 한해서만 제한적으로 원금을 감면하고, 성실 상환 유인이 상실되지 않도록 제도설계를 하여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독립적인 전문 기관의 정밀 실사를 제도화하여, 일시적 경기 충격으로 무너진 ‘정직한 실패자’와 회생 가능성이 없는 ‘고의적 부실 차주’를 엄정하게 구별해내는 옥석 가리기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신용정보법에 ‘채무조정기구에 대한 가상자산·금융재산 일괄 조회 권한’을 부여하는 것 한시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상시적인 제도가 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과잉부채 문제를 해결하는 부채 탕감은 채무자의 정신적·경제적 고통을 해소하는 따뜻한 포용금융의 좋은 도구이지만, 규율과 책임이라는 냉철한 이성이 보완적으로 결합되어야 금융의 지속가능성이 보장될 것이다.
출처 :
과잉부채의 덫과 포용금융: ‘부채 탕감’ 문제 – 오마이뉴스





